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(문단 편집) == 행운 == >숙부이신 시르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. "유수프, 짐을 꾸리거라. 우린 떠난다." 이 명을 받는 순간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줄 알았다. 나는 대답했다. "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길, 그들이 내게 이집트 왕국을 몽땅 바친다 해도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!" >---- >이집트 원정 전날 살라딘 >나는 숙부님을 따라가기로 하였다. 숙부님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서 세상을 뜨셨다. 기대도 하지 않았던 권력을 신께서 내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. >---- >살라딘의 회고 >나는 알렉산드리에서의 고초를 완전히 잊지 못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(이집트 원정 참여에 대해) 거절의 답변을 드렸다. 그러자 숙부께서 누르 앗 딘에게 말씀하셨다. "그래도 유수프는 나와 함께 가야 합니다!" 누르 앗 딘은 거듭 명하였다. 내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소용 없었다.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받들 수밖에 없던 나는 흡사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떠날 수 밖에 없었다. 살라딘은 이상하리만큼 '''[[행운]]이 많이 따랐던 군주'''로 평가된다. 그 예시들을 나열해 본다. * 2차 이집트 원정 때의 트라우마로 강력히 거부하던 3차 원정을 숙부 시르쿠와 누레딘의 강권으로 따라감. 그리고 와지르(재상)가 된 시르쿠가 취임 두 달만에 식사 중 호흡곤란으로 세상을 떠나며 그 뒤를 이어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와지르가 됨. (1169년 3월) * 와지르 취임 6개월 만에 십자군-동로마 연합군이 이집트를 침공. 하지만 내분과 물자 부족으로 연합이 와해되자 협상을 통해 철수시킴. (1169년 10월) * 주군 누르 앗 딘이 (살라딘의 명목상 주군인) 파티마 조의 칼리파 알 아디드를 폐위할 것을 명령. 그러나 적대적인 민심에 살라딘이 주저하던 터에 알 아디드가 21세의 나이로 요절. (1171년 9월) * 칼리파를 폐한 후 오히려 살라딘의 권력이 강화되자 누르 앗 딘이 직접 이집트를 장악하러 오기로 함. 그러나 장기 왕조의 충신이던 살라딘의 부친 아이유브가 시킨대로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내 무마시킴. (1171년 말) *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이유브가 사망하자 누르 앗 딘이 이집트 원정을 준비. 그러나 도중에 병사. (1174년 5월) *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아모리가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과 함께 이집트 원정 준비. 그러나 도중 병사. 나병 걸린 보두앵 4세 계승. (1174년 7월) * 시칠리아 함대가 아모리의 죽음 모르고 출항.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했으나 십자군의 호응은 없었고, 살라흐 앗 딘이 북상하자 철수. (1174년 8월) * 시칠리아 함대에 호응하여 반란 일으키려던 [[파티마 왕조]] 부흥 세력이 늦게 봉기했다가 진압됨. (1174년 9월) --4로 연합군 격파-- * 누르 앗 딘의 죽음을 틈타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,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룸 술탄국 군에게 패배하며 원정 좌절. (1176년 9월) * 동로마 함대가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아크레에 당도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내분(르노 vs 이벨린)으로 원정이 무산됨. (1177년 9월) * 알레포의 [[장기 왕조]] 지배자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불과 16세로 요절함. (1181년 12월) * 살라딘이 알레포-모술 원정에 나서 부재한 틈에 다마스쿠스를 맡은 동생 파루크샤마저 사망, 이에 [[보두앵 4세]]가 도시를 공격하였으나 병으로 철수함. (1182년 12월) * 엄청난 규모의 십자군을 이끌고 행군하던 [[신성 로마 제국]]의 황제 [[프리드리히 1세]]가 살라프 강에서 익사하며 3차 십자군 약화됨. (1190년 6월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